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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희 덩리쥔의 파란만장한 37년 인생

등록일 2020년05월09일 17시47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민족저널] 타이완 여가수 덩리쥔(邓丽君)은 1953년 1월 29일, 타이완 윈린현 바오충향 텐샹촌(台湾省云林县褒忠乡田洋村)에서 출생, 부친 덩쑤우(邓枢)는 일찍 광저우 황푸군관학교 제14기 졸업생이었고 어머니는 산둥 타이안(泰安)시 둥핑(东平)현 사람이다. 

1949년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철퇴한 뒤 덩리쥔은 가정의 넷째(위로 3명의 오빠가 있었음)로 태어났다. 

덩리쥔의 이름의 유래를 보면 부친 덩쑤우가 어느 한 전우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지은 것으로 원래의 이름은 아름다운 대나무란 뜻으로 덩리쥔(邓丽筠)이라 지어졌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덩리쥔(邓丽君)이라 불렀기에 그냥 그 것이 호적에까지 등록됙 되었다. 덩리쥔이 영문이름은 테레사 텅(Teresa Teng)으로 이는 그리스어로 수확의 뜻을 나타내며 저명한 수녀 테레사와 동명이었다. 

위로 오빠만 셋이 있다가 덩리쥔이 여자애로 태어나자 부모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특히 덩리쥔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바 어머니는 그 어디를 가나 딸을 데리고 다니며 자랑했다. 또한 덩리쥔의 어머니는 당시 영화와 연극을 구경하기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항상 어머니와 함께 이런 문화를 접하다보니 덩리쥔은 어릴적부터 중국 전통음악에 대해 익숙하게 되었고 그것을 사랑하고 또한 그것을 전공할 수 있는 토대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1963년 리한샹(李翰祥) 감독이 만든 영화 “양산백과 축영태”가 타이완에서 상영되면서 한시기 타이완에서는 중국의 5대 희곡 중의 하나인 황메이시(黄梅戏) 음악창법이 널리 유행되었고 당시 중화방송국에서는 황메이시음악 콩쿠르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자 덩리쥔은 은사의 제의에 따라 이 콩쿠르에 참가,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보좌에 올랐다.

이 때로부터 덩리쥔은 타이완 가요계에 정식으로 입문, 이것을 계기로 덩리준한테는 이러한 기회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1966년, 덩리쥔은 학업이냐 아니면 음악이냐 이 2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부친 역시 학교와 협의를 달성할 수 없었다. 최종 덩리쥔은 학교에서 중퇴하고 금마상 레코트 회사에서 펼친 가요콩쿠르에 나서서 우승을 따냈으며 그 때로부터 학교와 영영 고별을 선고, 14살 나잉 우주레코트회사에 취직하면서 프로가수의 인생에 들어섰다. 


리쥔은 노래에서만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1969년 덩리쥔은 어린 나이에 “고마워요 사장님”이란 영화에 출연, 영화에는 많은 노래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덩리쥔은 이 과정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내어 영화배우로서의 인생에 들어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덩리쥔은 영화배우에는 거의 관심이없었다. 

1970년, 17세에 난 덩리쥔은 홍콩 공업전시회에서 주최한 “백화유 자선바자회 가요콩쿠르”에서 우승보좌에 올라 사상 가장 나어린 “백화유 자선여황후”로 되었다. 이어 그녀는 자신의 두번째 영화 “가요팬아가씨”에 출연해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시 가요열창사업에서도 첫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면서 덩리쥔은 중국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발판으로 동남아의 화교시장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한편 오우양페이페이(欧阳菲菲)는 덩리쥔으로 하여금 일본에서 음악생애를 펼치도록 간접적으로 도와준 사람이었다. 1973년, 오우양페이페이와 홍콩가수 천메이링(陈美龄)이 일본에서 각각 레코트 대상을 획득하면서 일본 폴리도르 레코드(폴리도르 레코드) 회사에서는 동남아 지구의 가수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홍콩, 마카오와 타이완 지구에 사람을 파견해 고찰, 결과 홍콩의 정둥한(郑东汉)이란 사람으로부터 이상적인 여가수를 소개받았다. 그 출중한 여가수가 바로 덩리준으로 당시 그녀는 “오직 그대밖에 없어”란 노래로 일본 전문가들의 마음을 움직이었다. 

1971년 3월 25일, 덩리쥔은 홍콩스타 쩡소우츄우(郑少秋)와 함께 타이완,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드나들면서 활약, 당시 쩡소우츄우는 이미 3차례나 결혼한 몸이었지만 홍콩연예계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높았으며 거기에 덩리쥔까지 합세하자 이들의 몸값은 급상승했다. 당시 덩리쥔으로 말하면 나어린 가수에 불과했지만 이미 홍콩의 여풍레코드회사와 년 20만 홍콩달러로 계약을 맺은지라 연예인들 모두가 덩리쥔과 합작하기를 원했다. 거기에는 홍콩 일류의 사회자 썬덴샤(沈殿霞)도 있었다.

1978년 덩리쥔은 싱가폴,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국가들을 순회하면서 자신의 공연사업무대를 개척, 덩씨가문으로 말하면 일대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의 미감으로 말하면 덩리쥔은 그 무슨 대단한 미녀에는 속하지 못하겠지만 당시 그녀는 타이완의 “대중의 애인(大众情人)”인 쑤챵(萧蔷)한테 조금도 짝지지 않는 가요계의 제일 미녀였다. 

1979년 덩리쥔이 한창 자신의 사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뜻밖에서 가짜여권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덩리쥔한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지어 당시 많은 매스컴들에서는 덩리쥔을 공격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당시 덩리쥔은 타이완을 비롯한 홍콩, 마카오와 기타 동남아 지구에서 활동하기 매우 불편했다. 그녀는 부득불 자기의 활동무대를 다른 지역으로 선택, 단연히 미국행 유학으로 일본어, 영어와 생물, 수학 등을 배웠다. 그러다가 1979년 4월 캐나다의 밴큐버에서 개인콘서트를 개최, 이는 그녀가 처음으로 아메리카 지역에서 개최한 개인콘서트였다. 

1981년 덩리쥔은 5장 레코드상을 혼자서 받으면서 레코트 제작사상의 기록을 창조했다. 그녀가 바로 방송국에서 주최한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 일종 희극성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당시 방송국에서는 청룽(成龙)으로 하여금 귀빈이 되어 덩리쥔에게 상을 발급하기로 하였다. 

이 날 오후 갓 미국으로부터 홍콩에 도착한 덩리쥔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내속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당시 방송국의 한 일군이 레코드판을 든 청룽을 무대로 올리 밀었는데 무대로 올라온 청룽을 보자 덩리쥔은 너무도 뜻밖이라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1982년 1월 8일부터 11일까지 홍콩 이레사 체육관에서는 5차례에 달하는 개인콘서트를 마련, 매차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어 보우리진 녹음출판사(宝丽金录制出版)가 주최한 그 개인콘서트가 열렸으며  타아완 TV방송은 “천언만어(千言万语)”특집으로 덩리쥔의 개인콘서트를 녹화하였다.

이해 5월 덩리쥔은 고전특집 녹화계획에 들어갔고, 10월에는 린자샹(林子祥) 및 탄융린(谭咏麟)과 합작하여 홍콩에서 TV특집을 촬영했으며, 12월에는 홍콩에서 자선야회를 가지기도 하면서 개인사업의 고봉기에 들어서기도 했다.

1983년 덩리쥔은 초청으로 미국 라스베가스의 시저스팰리스 궁전에서 개인콘서트를 개최, 이 궁전에서 공연한 첫 중국인으로 되었다. 그 때 “바람과 서리는 나와 동반(风霜伴我行)”이란 노래로 무대에 오른 덩리쥔은 이어 “잘 있으라 나의 사랑(再见我的爱人)”, “첨밀밀(甜蜜蜜)” 등 노래로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었으며 공연은 생각밖으로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공연은 3차나 재차 막을 올렸고 원래 1100석을 차지하던 관중수는 1500석에 이르기도 했다. 

이로부터 덩리쥔은 국제스타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이 해 덩리쥔은 홍콩 홍감체육관에서 6차례의 콘서트를 가지고 자신의 가수생애 15주년을 기념, 이 콘서트의 제목은 “10억인의 박수갈채”로 번마다 초만원이었으며 티켓값도 최고로 치달아올랐다. 

지난 2010년 미국CNN(인터내셔넬)에서는 지난 50년간의 세계유명 음악인 20명을 평선, 이 중에는 짱궈룽(张国荣)과 덩리쥔이 화인 가수로 선정되었다

덩리쥔의 일생은 대체적으로 60% 이상이 공개된 정감세계에서 헤맨 인생으로 이 중 저명한 영화스타 청룽과의 한단락 정감유희가 많은 사람들의 흥미와 오락권의 대사로 남아있다. 청룽과 덩리쥔은 최종 각종 원인으로 가정을 이룰 수 없었으며 이로 하여 외계의 많은 사람들은 애석해 하기도 했다. 그리고 덩리쥔은 친샹린(秦祥林)과의 애정은 매우 진지했었다. 하지만 친샹린의 아내로 된 것 또한 덩리쥔이 아니라 린칭샤(林青霞)였다. 과거의 애정사에 대한 매스컴의 취재를 받들 때면 덩리쥔은 허다한 사랑은 각골명심할만한 사랑으로 감정투자가 많았다고 한다. 

덩리쥔은 늘 “애정이 많은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사랑의 신이 자신한테서 물러갈 때마다 있게 되는 덩리쥔의 일가견이었다.

덩리쥔의 첫 사랑은 그녀 나이 18세 때 찾아왔다. 상대는 말레이시사 화교청년이며 기업가인 린쩐파(林振发)였고 나이는 덩리쥔보다 8살 이상이었다. 당시 두 남녀는 혼인과 가정에까지 담론이 오갔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제 얼마 안있어 덩리쥔이 린씨네 며느리로 될 것으로 화제에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후 린쩐파는 돌연히 심장병이 발작했다. 소식을 들은 덩리쥔은 인차 당시 린쩐파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싱가폴로 날아갔으나 싱가폴 공항에서 덩리쥔은 자기의 애인이 이미 숨을 거둔 것을 보아야 했다. 그 때 린쩐파의 나이는 30여세에 불과했다…

그 뒤 덩리쥔은 늘 스캔들이 뒤따라고 있는 주젠(朱坚)이란 상인과 사귀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주젠은 당시 오락권내에서 상당한 배경이 있었으며 싱가폴 어느 한 나이트클럽의 보스였다. 그는 일찍 덩리쥔한테 많은 도움을 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덩리쥔은 주젠한테도 진심을 보이면서 그한테 일생을 의탁하려고 했었다. 

1972년 6월의 어느 날, 주젠은 홍콩에서 공연생활을 하고 있는 덩리쥔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만나러 홍콩으로 가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주젠이 탑승한 비행기가 베트남상공에서 실종되었고 홍콩 공항에서 주젠을 애타게 기다리던 덩리쥔은 사람도 보지 못하고 주젠과 사별해야 했다. 

덩리쥔과 지난 세기 70연대 타이완의 영화스타 친샹린(秦祥林)과의 애정은 “오케이”와 “노오”사이를 배회하기를 거듭했다. 당시 덩리쥔이 친샹린과 함께 유럽여행을 간 후 아버지는 이들의 동행을 부인하면서 그냥 우연하게 둘 다 유럽행을 했을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덩리쥔을 관심하는 모든 사람들은 줄곧 추궁하던 끝에 덩리쥔과 친샹린이 로스앤젤레스에서 함찍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 공개했다. 이에 대해 덩리쥔은 후에도 승인하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친샹린과 린칭샤의 혼인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1979년 9월, 덩리쥔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랜시스코로 날아가 청룽이 주연한 영화 “킬러호한(杀手壕)”을 보게 도었다. 당시 미국의 많은 신문들에서는 청룽이 덩리쥔을 끌어 안고 있는 사진을 게재, 둘은 매우 행복해보였다. 당시 청룽은 쿵후스타였고 가요계에서도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여기에는 덩리쥔의 공로도 한몫 있는 것으로 당시 미국시절 덩리쥔이 청룽한테 노래실력을 키워주었다고 한다. 그 뒤 중국 CCTV의 “예술인생”중 청룽은 덩리쥔과의 한단락 애정사를 회억하면서 몹시 가책에 시달리는 얼굴을 보이었다. 청룽은 당시 애정의 소중함을 몰랐다면서 후회, “이제와 생각해보니 잘못되었다. 당초에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어야 했다”고 밝혔다.  

한편 궈쿵청(郭孔丞)과의 애정사는 덩리쥔한테 가장 가슴 아픈 상처로 남기도 했다. 우선 싱가폴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애정이 불타올랐고 그 뒤 궈쿵청이 자기의 샹글리라호텔에서 덩리쥔을 초청해 그녀한테 구혼했었으며 결혼에 대한 담론이 오가기도 했다. 덩리쥔의 동생 덩창시(邓长禧)에 따르면 궈쿵청이 덩리쥔을 데리고 집으로 가자 곽가 가정의 직원들이 둘러싸고 사인성세를 들이대기도 했다. 그 뒤 덩리쥔은 궈쿵청의 조부모를 만나서야 가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궈쿵청의 조부모는 덩리쥔한테 3가지 조건을 제출했다고 한다. 즉 하나는 과거의 역사를 말끔히 교대하고 궈씨 가문에 시집온 후에는 즉시 연예권에서 퇴출하며 오락권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덩리쥔은 이 3가지 조건에는 자기를 기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인정, 접수할 수가 없어 퇴혼을 제출했다고 한다. 

그 뒤 얼마 안있어 궈씨 가문에서는 샹글리라 호텔에서 성대한 결혼연을 베풀었다. 단 당시의 결혼식의 주인공은 덩리쥔이 아니라 1명의 일본여인이었다. 

80년대 후기에 들어 덩리쥔은 점차 무대와 고별하고 반은퇴의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덩리쥔은 프랑스 파리로 이민하여 정착, 당시에서 자기보다 10여살 아래인 폴로를 알게 되었다. 폴로는 촬영애호자였다. 당시 덩리쥔은 그와의 결혼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혼인은 애정의 정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냥 애정의 과정을 체험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덩리쥔은 파리에 정착한지 얼마 안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당시 호흡도 질병으로 죽었다는 등 그녀의 사망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녀의 죽음을 두고 새로운 의문설이 제기되었다. 덩리쥔이 죽은 뒤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녀의 목에 손자국이 역력히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타살로 추측된다는 견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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